(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예술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자주 나오는 답변 중 하나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는 사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사람’일 것이다. 그 목적은 제각각이라 할지라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은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기본 덕목이다. 그런데 요즘의 미술을 보면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익숙한 이미지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 심지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용품의 이미지가 그대로 재사용되기도 한다. 당황스럽지만 미술관에서 공공연하게 전시가 되고 각종 매체에 당당하게 실리는 것을 보니 베끼고 변조하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100% 혁신적 예술이라는 허구

그것이 예술작품이든, 기성품이든 혹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생산물이든 간에, 이미 존재하는 원작의 일부를 빌려서 편집-각색하거나 재해석하는 행위를 차용이라고 하며 이것은 표절과 구별된다. 차용이 하나의 표현 방법으로 받아들여진 제일 큰 이유는 유일성, 순수성이 절대적으로 중요시되었던 모더니즘(modernism)적 창조 행위에 대한 반동이다. 아방가르드(avant-garde) 미술가들은 그 어느 시대의 예술가들보다 순도 100%의 혁신적인 예술을 보여주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어디에도 영향 받지 않은 독창성을 지향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미술가들도 감상자인 순간이 있다. 특별히 좋아하는 미술가도 있을 것이다. 그들도 미술관에 가고 화집을 본다. TV를 보거나 극장에 가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눈만 뜨면 무수한 시각적 생산물에 둘러싸이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시무시하게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창조 행위야말로 비현실적이고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미술가들은 독창성이 절대시되었던 미술의 신화를 깨뜨리고 미술과 일상을 연결시켜 예술 창조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기 위해 차용의 방법을 선택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서로 연결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융·복합적인 태도도 여기에 영향을 주었다.  

▲MR36, ‘제 8의 감상법’, mixed media, 65 x 51 x 9cm, 2016. 사진제공 = MR36

사실 차용은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의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미술가의 작품을 모작하면서 학습하거나 존경의 의미로 그들의 작품을 차용했다. 요즘만큼 빈번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적 실험을 위해 차용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네(Edouard Manet)는 티치아노(Tiziano Vecelli)와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e)의 작품을 차용했고, 피카소(Pablo Picasso)는 고야(Francisco Goya),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 팝 아트(Pop Art) 작가들은 주로 소비시대를 상징하는 상품이나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을 차용했다.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은 만화의 장면들을, 워홀(Andy Warhol)은 소비상품과 대중 스타들의 이미지를 선택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차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셰리 레빈(Sherrie Levine)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사진집에 실렸던 작품을 재촬영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전시했던 ‘워커 에반스를 따라서(After Walker Evans)’(1981)는 원본과 복제, 독창성, 미술사적 가치 등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차용의 방법이다. 황인기는 현대 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레고(Lego)나 크리스털(crystal)을 주재료로 하여 동서양의 명화들을 제작했다. 거대한 레고 산수화는 남다른 감흥을 이끌어낸다. 이이남은 움직임과 시간을 담아내는 미디어 산수화 작업을 선보였는데 정선(鄭敾), 김정희(金正喜) 같은 조선 시대 거장들의 작품을 세련되게 재해석하여 주목받았다. 한편 이동기의 아토마우스(Atomaus)는 미키 마우스(Mickey Mouse)와 철완 아톰(Mighty Atom)을 결합시킨 것이다.


임지빈은 베어브릭(Be@rbrick), 미쉐린(Michelin) 타이어, 프링글스(Pringles), 맥도날드(McDonald)의 아이콘(icon)들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룬다.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trademark)와 같은 베어브릭은 소비풍조가 만연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과 정체성에 대한 상징물로 존재한다.

한편 MR36(모즈 김동형, 료니)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원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를 풍자하기 위해 ‘제 8의 감상법’(2016)에서 ‘모나리자(Mona Lisa)’(1503-1506)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덮어버렸다. 이들의 작업은 모나리자의 복사본에 검정색 수염을 그리고 글자를 적어 전통적인 미술이 가진 아우라(aura)를 조롱했던 뒤샹(Marcel Duchamp)의 ‘L.H.O.O.Q’(1919)를 연상시킨다. MR36은 모나리자를 차용한 것인가? 아니면 모나리자를 차용한 뒤샹의 작품을 차용한 것인가?  

제프 쿤스는 차용 밝혔어도 표절 판결 받았는데

그런데 이처럼 차용이 오늘날의 미술 혹은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작업 방법 중 하나라면 왜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모든 것을 빌려오는 것이 가능하다면 창조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차용과 표절을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작가의 의도에 주목하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미학적 고민, 위계질서의 해체, 혹은 형식적 실험 등을 위해 이미 존재하는 원작을 빌려오되 그 출처를 밝히는 경우에는 차용으로 인정받는다.

만약 다른 사람의 원작을 베낀 뒤에 자기만의 창조물인 것처럼 속인다면 그것은 표절이며 법적,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제프 쿤스(Jeff Koons)의 사례처럼 미술가가 스스로 차용이라 밝히더라도 표절로 판결나는 경우가 있는데,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비단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미지의 무한 복제와 재생산이 가능한 오늘날, 차용이 동시대적 시의성을 보여주는 제작 방식임에는 분명하다. 그것은 단순히 창조성의 고갈이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 방법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차용의 범위와 의미, 가치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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